쟈니스 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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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2년 설립된 일본의 남성 연예인 전문 대형 연예 기획사.[2]
2. 역사
1970년대에는 소수의 여성 연예인도 키우고 있었으나[3] , '''1980년대 이후에는 남성 연예인만 키우고 있다'''. 설립 초기인 1960년대부터 쭉 남성 댄스 아이돌 분야를 파고든 회사로, 일본에서는 '''춤을 추며 노래하는 그룹'''이라는 콘셉트를 본격적으로 시도한 선구자적 회사로 알려져 있다. 이렇다 보니 일본에서는 '''남성 댄스 아이돌=쟈니스'''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대부분. 1980년대까지는 일본 아이돌계에서도 실력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뛰어난 댄스 실력과 피지컬을 가진 소년대, 롤러스케이트를 타며 춤을 추는 히카루GENJI 등 획기적인 콘셉트로 인기를 모은 아이돌 그룹을 계속해서 데뷔시켰다. 하지만 현재는 실력보다 그룹의 이미지나 캐릭터에 어울리는 멤버들을 주로 뽑아 데뷔시킨다는 느낌이 강하다.
쟈니스의 역사는 설립 이전인 1950년대부터 시작된다. 쟈니스의 창업주인 쟈니 키타가와는 대학생 시절인 1950년에 일본의 전설적인 대여가수 미소라 히바리가 미국 공연을 했는데, 마침 공연 관리를 맡았던 사람이 쟈니의 아버지와 지인이라 미소라 히바리와도 친분을 쌓게 되었다. 이 경험은 훗날 쟈니 키타가와의 연예계 진출의 계기가 된다. 쟈니가 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1955년, 밴드를 결성해 연예계에 진출하였다. 이후 일본에서 계속 살다가 30대 초반이던 1962년, 마침내 쟈니스 설립의 계기가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쟈니는 도쿄의 재일 미군 시설인 워싱턴 하이츠(現 요요기공원)에서 살고 있었는데, 쟈니의 집에는 신기한 미제 물건들이 많았기 때문에 동네 아이들이 쟈니를 아주 잘 따랐다고 한다.
그래서 쟈니는 동네 소년들을 모아서 '''쟈니스 소년 야구단'''을 만드는데, 본인은 이 소년 야구팀의 코치를 맡았다. 근데 이 야구단이 단순한 동네 야구 규모가 아닌 게, 당시 프로야구라든지 그 유명한 역도산에게서도 지원을 받을 만큼 규모나 영향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이 소년 야구단에서 근처 요요기중학교에 다니는 아이 4명이랑 같이 어느 날 영화를 보러 갔다. 그때 상영했던 영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 다들 큰 감동을 받아서 쟈니는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때의 소년 4명을 모아 '''쟈니스'''라는 최초의 그룹을 만들고 1962년 드디어 '''쟈니스 사무소'''를 창업한다. 누나인 메리는 당시 카운터바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쟈니가 창업한 이후 바를 폐점하고 쟈니스의 경리를 맡게 된다. 이후 쟈니는 당시 ‘엔카’가 주류였던 일본 가요계에 미국식 ‘쇼 엔터테인먼트’라는 개념을 들여와서 일본 대중들에게 소개하면서 이 분야의 선구자적인 길을 가게 된다. 당시 일본의 거대 기획사였던 와타나베 프로덕션의 의뢰로 1964년 쟈니스 소년 야구팀 중 4명을 뽑아 만든 동명의 댄스 그룹[4] 으로 데뷔했다. 회사 명칭은 사장의 미국식 이름에서 따온 것이긴 하나, 공식적으로는 ‘(댄스 그룹) 쟈니스의 소속사’라는 뜻에서 지었다고.
쟈니스는 1970년대 포 리브스(フォ一リ一ブス)와 고 히로미를 히트시키며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포 리브스는 당시 일본에서는 생소했던 춤을 추며 노래하는 10대 소년들의 아이돌 그룹이었는데, 일본 청소년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포 리브스는 1970년대 초까지도 홍백가합전에 연속 출전할 만큼 계속해서 인기를 모았다.
포 리브스가 시들해질 때쯤 등장한 또 한 명의 인재가 바로 고 히로미. 그는 노구치 고로, 사이조 히데키와 함께 신 고산케(新御三家)로 불리며, 1970년대 남성 아이돌의 Top3로 군림했다. 후술하게 되는 쟈니스 연습생 육성 시스템인 주니어 제도도 이 시기에 정립되었다. 하지만 고 히로미는 쟈니스에서의 활동에 회의감을 느꼈고, 마침 바닝프로덕션으로부터 이적 제안이 들어오자 1975년에 주니어 멤버 6명을 데리고 이적해 버렸다. 이후 쟈니스는 와타나베 프로덕션에서 벗어나 자체적인 연예 기획사로 독립한다. 이런저런 그룹과 솔로를 데뷔시키지만, 큰 성과는 없었고 1970년대 중후반 내내 암흑기를 보낸다.
1980년대 초반 쟈니스는 타하라 토시히코, 콘도 마사히코, 노무라 요시오 등 소위 말하는 타노킨 트리오를 차례로 데뷔시키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콘도 마사히코는 데뷔 싱글이 '''창립 이래 최초의 밀리언'''에 연간 3위라는 대기록을 세우는 등 쟈니스의 암흑기를 끝낸 일등공신으로 쟈니스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이 때문에 메리 부사장이 매우 아끼는 연예인으로 알려져 있다. 뒤이어 1985년에 소년대가 데뷔해서 히트하고, 1987년에 데뷔한 히카루GENJI는 사회현상으로까지 일컬어질 정도로 절대적인 인기를 자랑하였다. 쟈니스를 지금과 같은 제국의 위치로까지 끌어 올려 준 것이 바로 1980년대 말의 히카루GENJI. 롤러스케이트라는 당시로서 참신한 소재와 화려한 댄스 퍼포먼스가 어우러져 히카루GENJI는 당시 거의 사회현상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의 신드롬을 일으킨다. 당시 인기가 너무나도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이젠 그 누구도 쟈니스의 위치를 넘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에 실력파를 자처하며 데뷔한 오토코구미, 닌자 등이 실패하고[5] 설상가상으로 생방송 음악 프로그램인 TBS의 더 베스트 텐, NTV의 노래의 톱텐, 후지 테레비의 밤의 히트 스튜디오가 1990년까지 모두 폐지된다.[6] ‘아이돌의 빙하기’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아이돌 자체의 설 자리가 크게 좁아져 또다시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SMAP이 친근함을 내세워 버라이어티에서 활약하면서 점차 인기를 얻었으며, 현재의 쟈니스에 이르게 되었다.[7] 그리고 SMAP을 기점으로 20대 초중반, 5~10년 전후에 불과했던 아이돌 그룹의 수명이 크게 길어졌다. 1993년에는 NHK-BS2에서 여태 선배 그룹의 백업댄서 정도로만 알려졌던 쟈니스 주니어가 전면으로 나선 방송인 ‘아이돌 온 스테이지’[8] 가 시작되었다. 1995년에서 1999년 전후는 이른바 '''주니어 황금기'''로서 주니어의 인기가 웬만한 데뷔조를 능가하였다. 또한 1995년 V6를 시작으로 4년마다 배구 월드컵 이미지 캐릭터, 소위 '''배구조'''로 새 그룹을 데뷔시키는 체제도 만들어졌다.[9]
2010년대 초반에는 Kis-My-Ft2가 SMAP과 계속적으로 1:1 바타로 엮이면서 속칭 라인(파벌) 문제가 불거졌다.[10] 1980년대에는 쟈니 사장이 모든 데뷔조를 직할할 수 있었지만, 쟈니 사장이 나이가 든 것도 있고 SMAP 이후 아이돌 그룹의 수명이 길어지면서 모든 데뷔조를 혼자서 관리하기 어려워지자 복수의 간부를 중심으로 업무를 분담한 것이 이 ‘라인’의 기원으로 보인다. 이 ‘라인’은 다음과 같이 나뉘었는데, 라인이 다른 그룹은 절대로 방송에 같이 출연하는 일이 없었다.
- 이이지마 라인 : SMAP, Kis-My-Ft2, 야마시타 토모히사
- 쟈니 라인(미디어에 한해 이이지마 라인 관할) : Sexy Zone, A.B.C-Z, 나카야마 유마
- 중립 : KinKi Kids, 타키&츠바사
- 쥬리 라인 : 아라시, TOKIO, V6[11] , NEWS, 칸쟈니∞, KAT-TUN, Hey! Say! JUMP[12] , 쟈니즈WEST
2017년을 기점으로 팬들은 라인이 깨졌다고 보고 있다. 왜냐하면 그동안 공동 출연이 없었던 이이지마 라인의 아이돌과 쥬리 라인의 아이돌의 공동 출연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14]
3. 용어
4. 방침
5. 쟈니스 주니어
쟈니스 사무소에서 '''정식으로 데뷔하지 않은''' 연예인을 쟈니스 주니어라고 한다. 흔히 한국 아이돌계의 '''연습생'''에 대응되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약간의 차이가 존재한다. 쟈니스 주니어는 크게 도쿄 본사에서 선발해 활동하는 쟈니스 주니어(도쿄 주니어)와 칸사이 사무소에서 선발해 오사카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칸사이 쟈니스 주니어(칸사이 주니어)로 나뉜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콘서트나 방송 무대에서 선배 그룹의 백업댄서로 활동하며, 인기 주니어들은 버라이어티나 영화에서 활약하거나 독자적으로 유닛 활동을 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쟈니스 사무소에서는 '''CD 음반을 내야 데뷔'''한 것으로 간주했으나, 이쿠타 토마를 시작으로 음반을 내지 않고도 전업 탤런트로서 쟈니스 주니어를 졸업하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또 2012년에는 A.B.C-Z가 DVD 싱글로 데뷔하면서 그룹 데뷔의 의미가 확장되었는데, 이는 A.B.C-Z가 아크로바틱을 특기로 하는 그룹인 만큼 음반보다 영상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2017년에는 주니어 유닛 포유가 주니어 사상 최초로 '''유닛 전체 승격'''되었다.
6. 쟈니스 카운트다운 라이브
7. 비판
8. 오너 일가 및 주요 간부
일본 연예계에서 상당한 입지를 구축한 회사인 동시에 비상장 기업[15] 이며, 족벌 기업이다.
현재 등기임원은 메리, 쥬리, 타키자와 그리고 그 외 6명이다.
8.1. 쟈니 키타가와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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メリー喜多川 (97세)
쟈니 사장의 친누나이자 前 회장, 쟈니스 엔터테인먼트 대표. 1926. 12. 25 ~
쟈니스 사무소 창립 이전에는 요쓰야에서 바를 경영했다고 한다. 창립 초부터 쟈니 사장이 연출이나 캐스팅, 매니지먼트에 전념하는 반면, 재정 관리나 교섭, 접대 등 '''실질적인 경영 활동'''은 메리 부사장이 담당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재계에 상당한 인맥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원로 배우 모리 미츠코, 쿠로야나기 테츠코와 친분이 두터워서 이들에게 재정적 지원을 받아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16]
경영 활동 이외에도 각종 콘서트의 무대 의상을 담당했는데, '''깃털''', '''반짝이''', '''바지 옆선'''의 3종 세트가 바로 그녀의 작품. 나이가 나이인 만큼 현재 의상을 직접 제작하진 않겠지만, 여전히 이러한 의상들이 양산되고 있어 현재도 의상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듯하다.
2020년 2월 20일 보도에 따르면 고령으로 인해 회장직에서도 물러난다고 한다. 이미 실질적인 경영에는 참여하고 있지 않았으나, 이번에는 회장직까지 내려 놓고 경영선에서 완벽하게 물러나게 되었다.
8.3. 후지시마 쥬리 케이코
藤島ジュリー景子 (58세)
'''사장''' 겸 제이스톰 대표. 1966. 7. 20 ~
'''사실상 쟈니 기타가와의 후계자'''. 쟈니 사장의 조카이자 메리 부사장과 소설가 후지시마 타이스케(前 도쿄 신문 기자)[17] 의 딸이다.
쟈니스 사무소의 몇 안 되는 여성 탤런트로 활동했다. 타노킨 트리오와 함께 드라마 「3학년 A반 킨파치 선생」 1기에 출연하기도 하였으나, 정식 데뷔하지는 못하고 미국 유학을 거쳐 스타일리스트로 전향하였다. 쟈니 사장의 기대 속에 아라시와 NEWS를 맡았으나, 처음에는 크게 고전하다가[18] 2007년을 전후해 아라시가 국민 아이돌로 성장하고, NEWS 역시 2012년 4인 체제로 개편 후 안정된 활동을 보여 주고 있어 회사 내 입지가 굳어졌다. 2016년에 이이지마 미치가 퇴사한 후 찌라시에서 심심찮게 차기 사장 취임설이 등장하고 있는 듯. 그리고 2019년 사장에 취임했다.
업계에서는 교섭 스타일이 어머니인 메리 부사장을 닮았다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쟈니스의 실질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만큼 팬들에게 까이는 일이 많다. 팬들을 소속사 안티로 만드는 데 최대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8.4.
小杉理宇造 (77세)
前 고문 겸 스마일 컴퍼니[19] 사장, 쟈니스 엔터테인먼트 대표. 1947. 11. 10. ~
콘도 마사히코의 치프매니저 출신인데, RVC 레코드에 재직하던 시절 콘도를 맡고 쟈니 사장을 안 것을 시작으로 오늘날까지 쟈니스와 관계를 맺고 있다. 1989년에 일어난 나카모리 아키나의 이른바 사죄 기자회견은 그의 작품이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 그동안 다른 간부들에 비해 팬과 대중에게 크게 알려지지 않은 존재였으나, 2016년 SMAP 해체설 사건 때 주간지에서 이야기하며 다시금 그 존재가 알려졌다.
2019년 임원진 발표에서 그의 이름이 사라진 것으로 보아 일선에서 물러난 듯하다.
8.5.
飯島三智 (67세)
前 SMAP 치프매니저 겸 제이드림 이사. 1957. 2. 20. ~
원래는 사무 직원으로 입사하였으나, 무명에 가까웠던 SMAP을 맡아 오늘날 일본 최고의 아이돌로 키운 입지전적인 인물이다.[20] 방송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편이지만, SMAP 멤버들은 이이지마를 쟈니 사장 못지않게 특별한 존재. 어려운 시절부터 동고동락하여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 여긴다고 한다. SMAP 외에는 Kis-My-Ft2와 야마시타 토모히사의 매니지먼트를, Sexy Zone과 A.B.C-Z의 미디어 출연 관리를 맡았다.
2000년대 초반에 SMAP이 국민 아이돌로 자리잡은 반면, 쥬리가 담당한 아라시의 성장이 늦자 항간에는 쟈니 사장이 자신의 후계자로 이이지마를 낙점한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퍼지기도 하였다. 이후 세대 교체로 아라시가 쟈니스 판매량 부동의 탑에 서게 되고, 2015년 1월 메리 부사장이 주간문춘 인터뷰에서 '''차기 사장은 쥬리'''라고 대차게 밝혀 버렸다. 동시에 이이지마를 급히 호출하여[21] 자신과 대립할 생각이라면 SMAP을 데리고 나가 버리라고 말하기도.
그리고 2016년 1월 말에 정말로 이이지마가 쟈니스를 퇴사하면서 SMAP의 쟈니스 탈퇴 및 해체는 거의 기정사실화되는 분위기였으나, 생방송으로 대국민 사과를 통해 재결합을 밝혔다. 그러나 8월 13일, 결국 SMAP은 해체가 확정되었다.
메리 부사장이 이이지마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던 것은 아마도 SMAP의 독자 노선이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이지마가 SMAP을 처음 맡았을 때부터 쟈니 사장이 그에게 사실상 전권을 주었다. 이이지마 퇴사 이전까지 SMAP에 대한 사항은 쟈니 사장에게만 직보하는 체제가 구축되고 현장 매니저도 모두 그의 관할 하에 있었다.[22] 다른 간부들이 이에 위화감을 느끼면서 점차 이이지마 VS 쥬리(메리)의 구도가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2017년 이이지마 미치는 중국 쪽의 투자금을 바탕으로 커렌(CULEN)이라는 기획사를 설립했다. CUL TURE&EN TERTAINMENT라는 뜻으로 지어졌으며, SMAP의 前 멤버인 이나가키 고로, 쿠사나기 츠요시, 카토리 싱고를 영입했다. 현재 이 셋은 새로운 지도(NEWSMAP)라는 이름으로 홈페이지를 개설하여 활동 중이다.
8.6. 타키자와 히데아키
9. 팬덤
팬이 '''굉장히 많다'''. 게다가 여러 그룹이나 개인을 동시에 좋아하는 문어다리 팬질도 굉장히 흔한 편. 지나가는 쟈니스 팬을 붙잡고 물으면, ‘이치방(一番)’으로 꼽는 최고로 좋아하는 그룹 외에도 관심 있는 다른 그룹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것을 통칭 '''쟈단계(쟈니스 다단계)'''라고 부른다. 쟈니스 소속 연예인을 좋아하게 되면 대부분 그가 속한 그룹에 관심이 생기고, 그 그룹의 레귤러 프로그램이나 소속 멤버의 드라마를 보게 되면 거기에 출연하는 또 다른 소속 연예인에게 관심이 생기는 식으로 '''무한 루프''', '''끝이 없다'''. 쟈니스 빠도 오덕의 일종이니 덕계와 공통점이 많다. 쟈니스쪽이 그쪽보다 훨씬 좁긴 하지만, 의외로 깊고 빠졌다 싶으면 나가기가 힘들다. 그 외 성별이 반전된 것 말곤 별 차이 없다.
팬질하기에도 딱 좋은 시스템. 역사가 길다 보니 각 그룹 간 어필 포인트가 달라 미소년부터 미중년까지 취향대로 골라잡아 덕질하다 보면 하루가 심하게 짧다. SMAP 같은 경우엔 할머니와 손녀가 손을 잡고 콘서트를 구경하는 등. ‘치비 주니어(ちびジュニア)’로 콩알 같던 초등학생 소년을 눈여겨보았는데, 그 아이가 자라 번듯한 청년이 되어 데뷔할 때 왠지 자식 기르는 듯한 쾌감도 느낄 수 있는 것이 특징. 갈수록 CD 데뷔가 어려워지는 사내 구조 때문에 주니어 내 인기 유닛이었던 Ya-Ya-yah 멤버 4명 중 데뷔를 못 한 2명이 다른 소속사로 옮기는 사태가 발생했다. 아유카와 타이요는 유명 기획사인 프로덕션 오기로 이적해 2011년 URAKARA 10화 출연을 시작으로 다시 연기 활동을 하게 되고, 야마시타 쇼온은 동생 레온을 데리고 Sky Corporation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블로그를 시작한 뒤 쟈니스 측에서 뭐 하냐고 고나리를 받은 후 잠시 내릴 수밖에 없었다.
위와 같은 내한 사례를 통해 볼 수 있듯, 일본 가수 중에서 내한해 콘서트를 한다면 '''전 좌석을 매진시킬 수 있는 화력을 지닌 거의 독보적인 팬층'''(구매 능력이 뒷받침되는+여성 팬)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호쿠 대지진의 피해 지역에 발전차 2대와 전문 스태프, 생수 등을 실은 트럭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TOKIO, 아라시, KAT-TUN, Hey! Say! JUMP의 음반 레이블인 제이스톰에서 1억 엔을 적십자사를 통해 기부했다. 전지 9850개(내역: 단1전지 6630개, 단2전지 2160개, 단3전지 1060개), 회중 전등 608개, 방수 시트 120매를 센다이 지역에 지원하였다.
10. 한국에 끼친 영향
간혹 쟈니스는 일본에서만 그 영향력과 팬덤이 많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한국 연예계에도 쟈니스가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음악에 있어서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하기에는 많은 무리수가 있지만, '''적어도 연예 기획사 운영방식에 있어서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국 아이돌 하면 흔히 떠올리는 ‘소속사별 팬덤’, ‘연습생 시스템’, ‘연마다 열리는 체육대회’, ‘유닛’, ‘적극적인 예능 출연’과 같은 시스템들은 모두 쟈니스에서 먼저 시도되거나 적어도 일본 연예계에서 비롯된 것들이 대다수이다.[23]
다만, 한국의 경우에는 일본처럼 쟈니스가 남자 아이돌계를 독식하는 것이 아닌 다수의 연예 기획사가 존재한다. 방송계도 최소 10년 단위로 격변을 맞는 특성 때문에 일본처럼 고인물이 되지 않았'''었'''으나, 이제는 일본 못지않게 심각한 고령화 추세에 젊은 층이 주요 시청층에서 이탈하고 있다. 적어도 예능과 드라마에서만큼은 나이 들어가는 고정 시청층들을 위해 수년간 같은 인물들과 포맷을 돌려쓰는 등 고인물화가 상당히 진행 중에 있다. 그나마 가요계는 한류 열풍으로 시장이 지속적으로 활성화됨에 따라 많은 루키들을 데뷔시키고 있다.
실제로 한국에서는 과거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절에도 알게 모르게 쟈니스 음악이 퍼졌다. 대표적으로 1980년대 초반 콘도 마사히코의 ギンギラギンにさりげなく가 암암리에 인기를 끌었다. 1980년대 후반에는 롤러스케이트 퍼포먼스가 인상적인 히카루GENJI가 등장 후 한국에서도 어느 정도의 인지도가 있었으며, 이들과 관련된 팬 사이트가 히카루GENJI가 사실상 해체하고도 훨씬 시간이 지난 2000년대 후반까지 운영되었을 정도. 또한 당시 당시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KBS 젊음의 행진에서는 그들을 모방한 통크나이(야차)라는 그룹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한국 음악사에 최악의 흑역사 중 하나로 꼽히는 룰라의 천상유애 표절의 원곡도 쟈니스의 소속 아이돌 닌자의 데뷔곡 오마츠리 닌자였다. 다만 이 시절에는 인터넷이 보급되지 않았고, PC 통신 또한 속도가 매우 느렸기 때문에 일본 음악을 쉽게 집에서 접할 수 있던 시절은 결코 아니었다. 이로 인해 부산에 사는 사람이나 일본 대중문화에 관심 있는 사람을 제외하면 메이저한 수준은 절대 아니었고, 마이너 가운데서는 메이저한 수준이었다고 보면 된다. 물론 콘셉트를 조금씩 베끼는 경우는 적지 않았지만.
1990년대 들어서는 쟈니스의 전성기가 오면서 몇몇 한국 소속사, 대표적으로 SM엔터테인먼트의 설립자 이수만이 쟈니스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슈퍼주니어는 일본 쟈니스 사무소의 쟈니스 주니어를 참조해서 만들어 낸 동양적인 성격이 강한 그룹”이라고 슈퍼주니어를 소개했다. 또한 대성기획 소속이었던 젝스키스는 데뷔 때부터 멤버들의 나이를 기준으로 이미지를 달리한 블랙키스와 화이트키스로 나뉘었다. 훗날 멤버 이재진이 밝힌 바로는 V6[24] 의 콘셉트에서 따 온 것이라고 한다. 또한 콘서트의 굿즈 문화와 국내 아이돌들뿐만 아니라 조용필도 콘서트에서 자주 사용하는 무빙스테이지를 만든 것 역시 쟈니스이다.[25] SM의 연습생 시스템인 SM Rookies 또한 쟈니스의 연습생 시스템인 쟈니스 주니어에서 따 온 것.
쟈니스는 한국 가요계뿐만 아니라 한국의 영화와 드라마 등 연예계 시스템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2000년대 중반부터 한국은 아이돌 멤버 출신이 자신의 그룹이 해체된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배우로 입문하는 경우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2010년대부터는 댄스와 노래만 하던 아이돌 가수가 영화와 드라마 주연까지 손쉽게 하는 경우가 상당히 늘었다. 실제로 이는 쟈니스가 회사 권력을 이용해 자사 아이돌 멤버가 영화와 드라마 캐스팅까지 우선순위를 가지게 하도록 하는 운영방식을 한국의 연예 기획사들이 그대로 따라 한 것이다. 당연히 이것 때문에 한국에서는 이러한 한국 연예 기획사들의 행태가 한국의 영화와 드라마의 질적 저하를 일으킨다는 주장이 생기는 중.[26][27]
한국에서 일본 대중문화의 관심이 비교적 높았던 2000년대 초중반에는 팬덤의 규모가 상당했으나, 그 후 일본 대중문화가 침체기를 겪으면서 예전과 같은 팬덤 활동은 줄어든 편. 그나마 쟈니스 대표 아이돌인 아라시가 이제는 정말 얼마 남지 않은 한국 내의 일본 대중문화 팬덤의 중심 역할을 하는 중이다. 최근에는 쟈니스 공식 유튜브 채널도 개설되면서 뉴미디어를 통해 팬이 되는 사람들도 보이고 있다.
11. 현재 소속 연예인
현재 쟈니스 사무소 공식 홈페이지에 단독 페이지가 있는 그룹을 정식 데뷔조로 친다. 원래 쟈니스는 CD 데뷔를 해야 데뷔로 취급한다는 인식이 있었으나, 위에서 언급했듯 연기자 데뷔나 DVD 데뷔 등으로 기준이 바뀌었다. 그룹에서의 멤버 배열 순서는 공식 홈페이지에 실린 순서를 따른다.
11.1. 그룹
CD 데뷔 순으로 기재.
- 소년대 (1985) - 니시키오리 카즈키요, 히가시야마 노리유키, 우에쿠사 카츠히데
2019년 현재 쟈니스 최장수 그룹. 현재 쟈니스넷에서는 그룹으로 분류된 반면, 쟈니스웹(모바일 전용)에서는 솔로로 분류되어 있다. 현재는 그룹 활동이 거의 없고 솔로 활동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2020년 12월 31일을 끝으로 니시키오리 카즈키요와 우에쿠사 카츠히데가 쟈니스를 퇴소하는 것을 발표했다. 다만 그동안의 공로와 멤버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소년대라는 이름은 없어지지 않고 상징적으로 남아 유지된다.
현재 쟈니스 유일의 록 밴드 아이돌이었다. 그러나 2018년 야마구치 타츠야가 여고생 성추행 사건으로 탈퇴 후 음악활동이 중단되었고, 2021년 3월에 나가세 토모야가 쟈니스를 퇴소하는 것이 확정되었다. 남은 멤버들은 「주식회사 TOKIO」라는 쟈니스 그룹 산하의 자회사를 설립해 활동을 이어갈 예정이다.
배구 월드컵 이미지 캐릭터로 데뷔한 첫 그룹. 멤버 전원이 백턴을 할 수 있으나, 최근 들어서 예전처럼 자주 보여 주는 편은 아니다. 그러나 2015년 11월 베스트 아티스트에서 멤버 전원의 백턴이 생방송으로 방송되어 화제를 불렀다. 요리, 구루메, 사회, 연극,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 중.
- KinKi Kids (1997) - 도모토 코이치, 도모토 츠요시
2020년 현재 가장 큰 규모의 팬덤을 보유하고 있으며, 대중적으로도 가장 큰 사랑을 받고 있는 그룹이다. 일본 국내에서 ‘국민 아이돌’, 국외에서 ‘일본 아이돌’ 하면 가장 먼저 회자되며, 쟈니스의 간판 그룹이자 주 수입원. 한국도 자주 방문했으며[28] , 그 덕분에 한국 팬들이 상당히 많다.[29] 또한 콘서트의 규모가 거대하고 최신식 무대 장치만 도입하며, 멤버가 직접 하는 뛰어난 연출과 펜라이트 중앙 제어력 등 하나의 문화 콘텐츠로 유명하다.[30] 명문대 졸업에 아이돌 최초로 뉴스 캐스터 활동, 할리우드 진출, 일러스트 개인전 등 개개인의 역량도 그룹의 이미지에 있어 큰 몫을 한다.
모리우치 타카히로는 흡연 사진이 발각되어 2003년에 탈퇴해 현재 ONE OK ROCK에서 활동 중이다. 우치 히로키와 쿠사노 히로노리는 미성년 음주 문제로 탈퇴하였는데, 쿠사노는 2008년에 퇴소하고 우치는 현재도 쟈니스 소속의 솔로로 활동 중이다. 2011년에는 야마시타 토모히사가 솔로 활동을 위해, 니시키도 료가 칸쟈니∞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테고시 유야가 2020년 6월 전속계약 합의 해지로 탈퇴하여 현재 3인조로 활동 중.
최초의 칸사이 주니어 출신 그룹이자 쟈니스 최초 엔카로 데뷔한 그룹.[31] 니시키도 료와 우치 히로키는 NEWS와의 겸임 멤버였으나, 우치는 2005년 7월에 미성년 음주 사건으로 사실상 두 그룹에서 탈퇴 처리된다. 니시키도는 2011년 10월 7일에 NEWS를 탈퇴하고 칸쟈니∞ 활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시부타니 스바루는 2018년 4월 15일 기자회견을 열어 음악 공부를 위해 칸쟈니∞를 탈퇴할 것이며, 2019년부터는 쟈니스 사무소 퇴소를 발표하였다. 2019년 9월 5일 니시키도 료가 탈퇴 및 퇴소를 발표했다.
아카니시 진(A)은 2010년 7월에 그룹을 탈퇴하고 솔로 활동한 뒤 2014년에 퇴소했다. 타나카 코키(하이픈 뒤의 T)는 2013년 9월에 규정 위반으로 계약 해지되었다. 4인 체제로 정비 후 잘 활동하나 싶었지만, 2015년 11월 24일 ‘베스트 아티스트’ 생방송에서 다구치 준노스케(하이픈 앞의 T)가 탈퇴와 사무소 퇴소를 선언했다. 그리고 2016년 4월에 정식 퇴소. 이후 한동안 활동이 없었으나, 2018년이 되면서 활동을 재개하였다.
- Hey! Say! JUMP (2007) - 야마다 료스케, 치넨 유리, 나카지마 유토, 아리오카 다이키, 타카키 유야, 이노오 케이, 야오토메 히카루, 야부 코타, 오카모토 케이토
모리모토 류타로는 2011년 6월에 미성년 흡연으로 무기한 근신 처분을 받았다. 2014년 이후에 쟈니스 사무소를 퇴소해 미국 유학 후 친구들과 ‘제로’라는 댄스 유닛을 결성했다.
- Kis-My-Ft2 (2011) - 키타야마 히로미츠(Ki), 센가 켄토(s), 미야타 토시야(M), 요코오 와타루(y), 후지가야 타이스케(F), 타마모리 유타(t), 니카이도 타카시(2)
히카루GENJI 이래의 롤러스케이트 그룹으로 데뷔했으나, 얼굴이 못생긴 것으로 알려졌다. 아예 이걸 마케팅 포인트로 삼아 부사이쿠 유닛 결성 및 키스마이 BUSAIKU!?라는[32] 방송까지 만들었다.
멤버 차별 논란으로 힘들었던 시기를 견딘 후 강해지고 단단해진 그룹. 팬들과의 가까운 거리를 중시하며, 예능이 재밌다고 입소문을 타기도 하는 남고생스러운 그룹이다. 실제로 멤버들 나이도 어린 편.
아크로바틱을 특기로 하는 그룹으로, DVD 싱글로 데뷔하였다.
칸쟈니∞ 이후 10년 만에 데뷔한 칸사이 출신 그룹이다.
레이와 시대의 첫 데뷔이자 쟈니 사장 사후 첫 데뷔조로, 2019년 8월 8일 도쿄 돔에서 열린 주니어 콘서트에서 2020년에 데뷔하는 것을 발표했다. 동시에 두 팀이 데뷔를 하는 것은 쟈니스 사상 최초.[36]
11.2. 솔로
데뷔 연도는 그룹으로 데뷔 → 솔로 데뷔 순으로 기재한다.
- 콘도 마사히코 (1980)
- 우치우미 코지
- 사토 아츠히로
- 오카모토 켄이치 - 아들이 Hey! Say! JUMP의 오카모토 케이토로, 쟈니스 최초의 부자 데뷔.
- 기무라 타쿠야
- 이쿠타 토마 (2010) - 2010년 8월 31일자로 쟈니스 최초 전업 탤런트로서 주니어를 졸업하였다.
- 우치 히로키 - 미성년 음주 문제로 근신한 뒤 2006년에 연수생으로 복귀했다. 이후 2008년 1월 3일에 연수생을 졸업하고 주니어로 승격하였으며, 2013년 10월 21일자로 단독 페이지가 생성되어 데뷔조가 되었다.
- 나카야마 유마 (2010 → 2014) - 2012년 10월에 솔로 CD를 내고 2014년 4월에 정식으로 솔로 데뷔하였다.
- 야라 토모유키 (2015)
- 카자마 슌스케 (2015) - 유희왕 시리즈의 초대 주인공인 무토우 유우기와 어둠의 유우기 담당 성우로도 유명하다. 당연히 전문 성우가 아니라 연기력이 떨어져 초반엔 욕도 많이 먹고 각종 MAD의 개그 소재로 쓰였으나, 짬밥이 쌓이면서 현재는 괜찮아졌다.
- 하세가와 준 (2015) - 이쿠타 토마, 카자마 슌스케, 하세가와 준은 4TOPS라는 주니어 유닛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야마시타만 NEWS로 데뷔하고 나머지는 여전히 주니어로 활동하였다. 2010년에 이쿠타의 단독 페이지가 생성되고 2015년에 카자마와 하세가와도 단독 페이지가 생성되어 주니어를 졸업하였다.
- 포유[37] (2018) - 후쿠다 유우타, 타츠미 유우다이, 코시오카 유키, 마츠자키 유스케로 이루어진 4인조 유닛으로 KinKi Kids나 타키&츠바사 콘서트에서 백을 역임, 주로 뮤지컬이나 부타이 위주로 활동했다. 2017년 10월 1일 쟈니스 주니어 졸업을 발표했으며, 2018년 3월 13일 공식 홈페이지가 생성되면서 데뷔조로 승격되었다. CD 데뷔가 아닌 유닛의 데뷔 승격은 쟈니스 최초이다.
- 하마나카 분이치 (2018) - 칸사이 쟈니스 주니어 출신으로, 타키자와 히데아키가 프로듀스했던 유닛 부도칸의 멤버로도 활동하였다. 2018년 3월 13일 포유와 함께 공식 홈페이지가 만들어지면서 주니어를 졸업했다.
- 하야시 쇼타 (2020) - They부도 및 우주Six 멤버로 활동하다 탈퇴하여 배우 노선을 걷기 시작한 후 2020년 6월 20일, 결혼과 함께 승격이 발표되면서 주니어를 졸업하였다.
12. 과거 소속 연예인
여성 탤런트는 '''♀'''로 구별하며, 현재 솔로로 쟈니스 사무소에 소속된 연예인은 굵은 글씨로 쓴다.
12.1. 그룹
12.1.1. 해체한 그룹
- 쟈니스 (1964~1967) - 마이에 히로미, 이이노 오사미, 나카타니 료, 아오이 테루히코
- 포리브스 (1968~1978) - 키타 코지, 아오야마 타카시, 에기 토시오, 오리모 마사오, 나가타 에이지
- 주크복스 (1970~1973) - 코타니 츠네요시, 카자마 타다요시
멤버 변동이 많아 제1기에서 제7기로 나뉜다. 해체 당시 남은 멤버는 2명.
- 쟈니스 주니어 스페셜 (1974~1978) - 이타노 토시오, 하야시 마사아키, 하타케야마 마사히사
- 리틀 갱 (1975~1976) - 마츠바라 히데키, 소가 야스히사
- VIP (1978~1979) - 이타노 토시오, 하야시 마사아키, 하타케야마 타카히사, 카와무라 노부코♀, 요시모토 카즈코♀
쟈니스 주니어 스페셜(JJS) 멤버와 여성 멤버가 합쳐서 만든 혼성그룹.
- 쓰리 양키스 (1978~1980) - 하시모토 미사코♀, 카와사키 시즈코♀, 마츠오 타카코♀
- 시부가키대 (1982~1988) - 후카와 토시카즈, 모토키 마사히로, 야쿠마루 히로히데
- 이글스 (1982~1985) - 나카무라 시게유키, 우지 마사타카, 우치우미 코지, 오오사와 미키오
- THE GOOD-BYE (1983~1990) - 노무라 요시오, 소가 야스히사, 카가 하치로, 에토 코이치
타하라 토시히코, 콘도 마사히코와 함께 타노킨 트리오의 멤버였던 노무라 요시오가 결성한 밴드로 리틀 킹으로 데뷔했던 사가 야스히로가 멤버로 활동했다.
- 오렌지 시스터즈 (1984~1985) - 요시타케 카요코♀, 사카이 사에(현 아사이 유키노)♀, 요시카와 마사미♀
쟈니스의 마지막 여성 아이돌.
- 히카루GENJI (1987~1995) - 우치우미 코지, 오오사와 타카오, 모로호시 카즈미, 사토 히로유키, 야마모토 준이치, 아카사카 아키라, 사토 아츠히로
아카사카 아키라는 그룹 해체 뒤에도 쟈니스 사무소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2007년에 마약 복용으로 해고되었다.
- 오토코구미 (1988~1993) - 나리타 쇼지, 타카하시 카즈야, 오카모토 켄이치[38] , 마에다 코요
- 닌자[39][40] (1990~1997) - 야나기사와 스스무, 엔도 나오토, 마사키 신야, 타카기 노부히데, 시가 야스노부, 후루카와 에이지
- SMAP (1991~2016) - 나카이 마사히로, 기무라 타쿠야, 이나가키 고로, 쿠사나기 츠요시, 카토리 싱고
일본의 레전드 국민 아이돌이자 아이돌의 패러다임을 바꿔 현재의 쟈니스는 물론 동아시아에 큰 영향을 준 그룹이다. 모리 카츠유키는 모터레이서가 되기 위해 1996년에 탈퇴하고 사무소를 퇴소. 2016년 12월 31일 공식적으로 해산. 멤버들은 전원 사무소 잔류. 하지만 이후 2017년 6월 18일 이나가키 고로, 쿠사나기 츠요시, 카토리 싱고는 9월 8일부로 쟈니스와의 계약을 종료하고 퇴소하는 것을 알렸다. 2020년 2월 21일, 나카이 마사히로도 기자회견을 통해 2020년 3월 31일부로 쟈니스 사무소에서 퇴소할 예정임을 밝혔다.
2017년 9월 3일 무기한 활동 중지를 발표하고 2018년 9월 13일에 이틀 전 데뷔 15주년을 기해 해산한 것이 발표되었다. 이후 타키자와 히데아키는 연예계를 은퇴하고 주니어들의 육성 및 관리에 힘쓸 것을 발표했다. 이마이 츠바사는 쟈니스를 퇴소한 이후 앓고 있던 메니에르병의 치료에 집중하며, 최근 부타이를 통해 복귀하였다.
12.1.2. 탈퇴 멤버
- 니시키도 료 - 前 칸쟈니∞.
- 다구치 준노스케 - 前 KAT-TUN.
- 모리모토 류타로 - 前 Hey! Say! JUMP.[41]
- 모리우치 타카히로 - 前 NEWS, 現 ONE OK ROCK.
- 아카니시 진 - 前 KAT-TUN.
- 야마구치 타츠야 - 前 TOKIO.
- 야마시타 토모히사 - 前 NEWS.
- 우치 히로키 - 前 NEWS, 칸쟈니∞.
- 시부타니 스바루 - 前 칸쟈니∞.
- 쿠사노 히로노리 - 前 NEWS.
- 타나카 코키 - 前 KAT-TUN.[42]
- 테고시 유야 - 前 NEWS.
12.2. 솔로
그룹으로 정식 데뷔한 적이 없는 솔로 연예인만 여기에 서술한다.
- 이이노 야스요♀ (1968~1971)
활동 중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
- 나가타 에이지 (1969~1977)
- 우치다 에이지 (1970~1976)
- 시마다 준♀ (1970~1977)
포리브스의 아오야마 타카시와 결혼하여 연예계 은퇴. (후에 이혼)
- 고 히로미 (1972~1975)
- 아오이 테루요시 (1973~1976)
- 아오야마 노부히로
포리브스의 아오야마 타카시의 동생.
- 이노우에 준이치 (1975~1984)
- 토요카와 죠 (1975~1979)
- 도노 유타카 (1975년 데뷔)
- 모리타니 아키라 (1976년 데뷔)
- 미토 유우 (1976년 데뷔)
- 카와사키 마요 (1977~1989)
- 아카기 사토시 (1979년 데뷔)
- 타하라 토시히코 (1980~1994)
- 히카루 잇페이 (1981~1982)
- 사노 미즈키 (2015~2018)
1991년 9월 26일에 입소해 무려 24년 동안 쟈니스 주니어였다. 2015년 10월 15일자로 단독 페이지가 생성되면서 주니어를 졸업했으나, 2018년 12월 31일부로 퇴소한 것이 밝혀졌다.
13. 주요 자회사
- 쟈니스 엔터테인먼트(Johnny’s Entertainment)
1997년 KinKi Kids의 데뷔와 함께 최초의 자체 레이블로 설립되었다. 소년대, NEWS, 나카야마 유마, 쟈니즈WEST의 음반 및 DVD 발매를 맡고 있으며, 현재는 제이스톰 산하에 쟈니스 엔터테인먼트 레코드로 사명을 변경하여 속해있다.
- 제이스톰(J Storm)
쟈니 사장의 조카인 쥬리 부사장이 대표로, 이름 그대로 2001년 아라시의 전용 레이블로 설립되었다. 이후 KAT-TUN, Hey! Say! JUMP, TOKIO, 칸쟈니∞(인피니티 레코드)의 음반 및 DVD 발매를 맡게 되어 현재에 이른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 주식회사 쟈니즈 출판
쟈니스 음악 저작권 관리.
- 제이스테이션(J-STATION)
쟈니스 샵의 경영.
- 도쿄 글로브좌(The Globe Tokyo)
1988년에 지어진 공연장을 2002년에 파나소닉으로부터 인수하였다. 쟈니스 탤런트가 주연인 부타이 공연을 기획, 상연하고 있다.
- 쟈니스 패밀리 클럽(Johnny’s Family Club)
공식 팬클럽의 운영과 회원 관리를 담당.
- 주식회사 쟈니스 아일랜드
- 한마음 주식회사
광고 사업.
- 아트 뱅크
모바일 컨텐츠 사업.
- 영 커뮤니케이션(콘서트 사무국)
공식 팬클럽 회원을 대상으로 하는 콘서트, 공연의 티켓 신청과 추첨을 담당.
14. 여담
- 쟈니스는 비상장 기업이라 매출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2019년 7월 기사에 의하면 제이스톰과 음악 저작권을 관리하는 쟈니스 출판 등 10개가 넘는 자회사와 그룹 전체 매출 합계가 약 1,000억 엔(한화 1조 원)을 넘는다고 한다.
- 사실 Johnny를 ‘자니(ジャニ)’라고 읽는 것이 일본에선 상당히 이례적인 발음이다. 왜냐하면 일본에선 보통 이 단어를 조니(ジョニ)로 표기하기 때문. 이는 단모음 o를 읽을 때 생기는 미국식과 영국식 발음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다. 한국에선 미국식 발음을 따르는 편이라 [ˈdʒɑni]가 익숙하겠지만, 일본에선 영국식 발음을 따른 [ˈdʒɒni] 쪽이 통용되는 편이다.[43] 그러므로 일본에서 Johnny를 ‘죠니’가 아닌 ‘쟈니’란 이름으로 부르고 퍼뜨린 건 확실히 독특한 케이스이다. 그리고 영어의 소유격을 나타내는 ‘s’는 무조건 [s]로 읽는 게 아니라 앞에 무슨 음이 오느냐에 따라 발음이 달라진다. Johnny’s에서는 앞에 모음이 오기 때문에 유성음화되어 [z]로 읽힌다. 그래서 일본어로도 쟈니즈라고 쓴다. 그런데 왜 한국에선 ‘즈’가 아닌 ‘스’라고 쓰냐면, 한국의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영단어 끝에 붙는 s는 실제 발음과 상관없이 ‘스’로 적도록 규정했기 때문이다. 덧붙여 ‘쟈니스’가 아닌 ‘자니스’로 표기되어야 맞는다.
- 일본에서 꽃미남을 가리키는 표현 중 하나인 쟈니스계(ジャニーズ系) 역시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일반적인 의미는 “잘생기면서도 귀여운 남자”. 하지만 “꽃미남=쟈니스계”는 아니며, 쟈니스계는 꽃미남의 수많은 유형 중 하나일 뿐이다.
- 현재 본사는 旧 SME(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 노기자카(乃木坂) 빌딩으로 2018년 2월 매입해서 이전했다.[44] 기존의 쟈니스 본사 건물과 불과 몇십 미터 안 근처에 있어서 기존의 사옥도 그대로 쓰이고 있는 듯.
- 매주 일요일 11시에 NHK에서 ザ! 少年クラブ(자! 소년구락부)라는 프로그램을 방송하고 있다.
- 쟈니스 내 소형 선박 조종 면허 소유자들이 꽤 많다.[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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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츠카 쇼타 || 하야시 쇼타 ||}}}
[1] 퇴임 예정.[2] 참고로 한국에서는 연예 기획사라고 하지만, 일본에서는 예능 사무소(芸能 事務所)라고 지칭한다. 연예인도 일본에서는 예능인이라고 한다. 밀접한 관계인 광고 회사도 일본에서는 광고 대리점(広告 代理店)이다.[3] 앞서 언급한 것처럼 쟈니 사장의 조카인 쥬리 부사장도 연습생 출신이다.[4] 현재 쟈니스라는 명칭은 쟈니스 사무소의 약칭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그러므로 이 댄스 그룹을 지칭할 때는 보통 '''초대 쟈니스'''라고 한다.[5] 오토코구미는 아주 실패한 건 아니었다. 데뷔 초기 때는 오리콘 차트 1위도 여러 번 차지한 데다 도쿄 돔 공연까지 했을 정도로 나름 인기가 좋았던 아이돌 그룹이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히카루GENJI가 압도적인 인기를 얻는 바람에 전성기가 짧았을 뿐. 해체 이후에는 각자 뮤지션, 배우의 길을 택했고 멤버 중 한 명이었던 나리타 쇼지는 2009년에 대마초 소지 혐의로 체포된 사례가 있었다.[6] 지금에야 일본에서 음악방송이라고 하면 뮤직 스테이션부터 떠올리겠지만, 1980년대 음악방송이라고 하면 위의 세 방송을 가리켰다. 히카루GENJI 등을 비롯한 아이돌의 주된 활동 무대도 이쪽이었다. 뮤직 스테이션은 1986년에 시작된 '''후발주자'''로, 시청률 확보에 크게 고전하다가 1988년부터 히카루GENJI가 매주 출연하면서 가족 대상에서 청년 대상으로 노선을 바꾸고 지금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7] 1992년에 SMAP이 후지 테레비의 ‘꿈이 MORI MORI’로 첫 레귤러 버라이어티에 출연할 때, 쟈니 사장이 담당 프로듀서에게 “벗는 것만 빼고 뭐든지 해도 좋다”고 한 일화는 팬들 사이에서 유명하다.[8] 이 방송은 1997년에 ‘뮤직 점프’를 거쳐, 2000년부터 ‘더 소년구락부’로 바뀌어 현재에 이른다.[9] 다만 배구 월드컵으로 데뷔한 팀은 2011년 Sexy Zone이 마지막.[10] 일본에서는 ‘파벌’로 불린다. 한국에서도 초기에는 ‘파벌’이라는 용어가 그대로 쓰였으나, 어감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인지 점차 ‘라인’이라는 표현으로 굳어졌다. 한국에서 ‘파벌’이라는 말은 대개 사내정치라는 의미에서만 쓰는데, 쟈니스의 ‘파벌’은 사내정치보단 매니지먼트 분담이라는 특성이 더 중요한 만큼 표현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11] V6는 애매한 편이었으나, 2014~2015년을 전후해 쥬리 라인으로 분류되었다.[12] Hey! Say! JUMP는 원래 쟈니 라인이었으나, 2013~2014년을 전후해 쥬리 라인으로 분류되었다.[13] 일본의 연예 전문 리포터 이노우에 코조는 2015년 가을 무렵 Kis-My-Ft2와 야마시타 토모히사가 쥬리 라인 측으로 넘어갔다고 언급하기도 하였다.[14] 다만, 2020년부터 현지에서 쥬리 라인과 타키자와 라인으로 구별하고 있다. Snow Man과 쟈니스 주니어 유닛 IMPACTors는 타키자와 쪽으로, 쟈니스 주니어 인기 유닛인 나니와 단시는 쥬리 쪽이라는 말이 많은 것으로 보아 아직은 쥬리와 타키자와가 밀어 주는 그룹이 서로 다른 흐름인 듯.[15] 실제로 일본의 기획사들은 경영권 및 정보 공개 문제 때문에 비상장 기업이 많다. 호리프로와 에이벡스, 아뮤즈가 상장 기획사의 대표적 사례.[16] 이후 모리 미츠코와 쿠로야나기 테츠코는 쟈니스 카운트다운 라이브를 비롯한 여러 공연에 게스트 출연하고 있다. 2012년에 모리 미츠코가 사망했을 때, 다수의 쟈니스 탤런트들이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쟈니스 팬들에게는 여러모로 애증의 존재라고 할 수 있을 듯.[17] 후지시마 타이스케에게는 원래 아내가 있었으나, 요쓰야의 바에서 메리와 눈이 맞아 쥬리를 낳은 뒤 이혼하였다. 덧붙여 소설가 외에 보수 우익 성향의 사회 평론가로도 활동했다. 1974년에 시인 김지하가 군사정권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자 일본 팬클럽 대표로 내한해 '''그의 사형 선고는 문학 활동이 아니라 정치 활동 때문'''이라고 발언하여 일본 팬클럽이 뒤집어진 적도 있었다고. 1997년에 암으로 사망.[18] 2000년대 초반 아라시는 스캔들과 캐릭터 변화로 혼란을 겪었으며, NEWS는 사건사고와 멤버 탈퇴가 이어졌다. 그래서 이후 데뷔한 Hey! Say! JUMP와 Sexy Zone 등은 쟈니 사장이 직할하였는데, 항간에는 이를 두고 쟈니 사장이 쥬리 부사장에게 실망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기도 하였다.[19] 야마시타 타츠로와 타케우치 마리야의 소속사. 쟈니스 계열사는 아니다.[20] 쟈니스 사무소는 원래 여성을 매니저나 스타일리스트로 쓰지 않는다. 여성 직원은 있지만 모두 사무직이며, 쟈니스 탤런트와 같이 일하는 여성 스타일리스트는 모두 외주직원.[21] 이 사건으로 한때 '''“이이지마를 불러(飯島を呼んで)”'''라는 말이 인터넷에서 유행하기도 하였다.[22] 그래서인지 SMAP은 쟈니스 내 타 그룹과 접점이 적은 편이다. 그나마 Kis-My-Ft2와 Sexy Zone이 데뷔하고 이이지마가 미디어 스케줄을 맡으면서 같이 방송에 출연하는 경우가 늘어난 것.[23] 다만, 이를 가지고 “K-POP이 J-POP의 후속이네”와 같은 말을 하기에도 무리가 있다. 애당초 쟈니스의 운영방식 외에 한국이 영향을 받았다고 할 만한 것이 사실상 전무하기 때문. 그 운영방식 또한 거슬러 올라가면 미국의 뉴 키즈 온 더 블록과 뉴 에디션을 거쳐 넷플릭스의 K-POP 다큐가 지적했듯, 결국에는 잭슨 파이브를 만들어 낸 1960년대의 모타운 레코드에 도달하게 된다. 과거 한반도를 통해서 일본으로 전해진 문화를 오늘날 한국이 “한국의 아류작”이라고 하지 않는 것처럼 문화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하는 것이기에 철 지난 원조 논쟁은 별 의미 없다. 2010년대에 들어서는 오히려 J-POP이 K-POP의 영향을 받는 경우가 많아졌다. 결과적으로 끼친 영향은 상술했듯 시스템적인 구조적 측면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이러한 점이 명확히 드러나는 곳은 SM 소속 아이돌 그룹 정도. 그러나 2000년 후반 K-POP 그룹은 이미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시스템을 갖추었다.[24] V6은 연장조를 토니센(20th century), 막내조를 카미센(Coming Century)으로 나눴다.[25] 무빙스테이지는 처음 고안한 것이 아라시의 마츠모토 준이며, 명칭을 지은 것은 오노 사토시. 일본에서의 사용 권한은 쟈니스에게 있다.[26] 특히 SM엔터테인먼트가 이것 때문에 욕을 엄청나게 먹었다. 발연기 논란 외에도 드라마 스케줄 등 중요한 행사를 참석할 수 없어서 팬덤에서도 문제가 되는 중. 거기다 SM에서 만든 드라마들(SM C&C 제작)은 작품면에서도 평가가 매우 안 좋아 웬만한 드라마 팬들도 다 기피하는 편이다.[27] 다만, 아이돌들의 주연 캐스팅 문제는 하도 욕을 많이 먹어서 요즘에는 가벼운 단역 정도면 몰라도 주연급 캐스팅에 덥석 오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거기다 기획사에서도 아예 처음부터 연기 담당 멤버를 뽑아 놓거나 따로 트레이닝을 시키는 식으로 대비하는 편이라 예전보단 논란이 매우 줄었다.[28] 상대적으로 많이 방문했지만, 팬들이 애원하는 만큼 오진 않았다. 멤버인 사쿠라이 쇼가 NEWS ZERO 때문에 한국에 몇 번 방문하였지만, 아무도 모르게 방문 후 돌아갔다.[29] 한국에 많이 방문해서 팬이 많다기보단 멤버 마츠모토 준이나 니노미야 카즈나리 등 멤버들이 유명한 일본 드라마에 많이 출연하기 때문에 그로 인해 알게 되거나 입덕을 하게 된다. 마츠모토 준의 고쿠센, 너는 펫, 꽃보다 남자 등이 대표적. 2010년에는 일본관광청 홍보 모델로 한국 지상파 방송에 CF로 등장하기도 했다.[30] 트위터를 많이 하는 사람이라면 그룹 이름은 몰라도 한 번쯤 봤을 콘서트 영상. “일본의 콘서트 연출력이 궁금하다면 아라시 콘서트를 보라”는 말이 있을 정도.[31] 멤버들이 악기를 잘 다루며, 콘서트와 음악 프로그램에서 밴드 세션을 선보이는 경우가 많아 TOKIO 이후 밴드 콘셉트 그룹으로 분류되기도 한다.[32] 일본어로 BUSAIKU(부사이쿠)는 추남을 뜻한다.[33] 배우 쿄모토 마사키의 아들.[34] Hey! Say! JUMP 前 멤버 모리모토 류타로의 동생.[35] KAT-TUN 前 멤버 타나카 코키의 동생.[36] 2001년 타키자와 히데아키와 이마이 츠바사의 각각의 솔로 데뷔가 발표난 적은 있지만, 후에 두 사람이 합의하여 타키&츠바사로 함께 데뷔했다.[37] 그룹이나 홈페이지 상에서는 솔로로 분류되어 있다.[38] Hey! Say! JUMP 오카모토 케이토의 아버지[39] 대표곡으로는 <오마츠리 닌자(お祭り 忍者)>가 있다. 참고로 이 곡은 1990년대 중반에 크게 인기를 끌던 한국의 대표 혼성그룹 룰라에 의해 <천상유애>라는 이름으로 표절을 당했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40] 데뷔 전 유닛명은 소년닌자. 현재 소년닌자라는 이름은 새로운 멤버들이 쟈니스 주니어 유닛으로 활동하고 있다.[41] SixTONES 모리모토 신타로의 형.[42] SixTONES 타나카 쥬리의 형.[43] rock을 ‘락’으로 읽느냐 ‘록’으로 읽느냐와 같은 경우. 한국에서도 외래어 표기법상으로는 영국식 발음을 우선한다.[44] 참고로 노기자카 빌딩은 SME산하 걸그룹인 노기자카46의 이름이 된 소니뮤직의 유서 깊은 사옥이었으나, 현금유동성을 위해 SME이치가야빌딩(市ヶ谷ビル)과 함께 매각이 발표되었고 이후 노기자카 빌딩은 쟈니스가 구입한 것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쟈니스가 구입한 금액은 공개되지 않았으나, 대략 5-60억엔 정도로 일본언론은 추산했다.[45] 아이바 마사키도 취득했으나, 갱신하지 않아서 만료되었다.[46] 무라카미 싱고는 취득 사실이 알려졌으나, 급수가 불분명.[47] 니노미야 카즈나리(二宮 和也)와 카메나시 카즈야(亀梨 和也)의 경우 한자는 같지만, 읽는 법이 다르므로 제외.[48] 오카모토 켄이치와 오카모토 케이토는 부자 관계이므로 제외.